응급실도 산부인과도 사라지는 나라, 대한민국 필수의료 붕괴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년간 ‘필수의료’라는 단어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상 속 위험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필수의료란 쉽게 말해, 생명과 직결되는 응급 진료, 출산, 중환자 치료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의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 알고 계셨나요?
지방 소도시뿐 아니라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서 응급실 이용이 어려워지고, 산부인과 폐업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실제로 병원은 있지만 진료할 의사가 없어 생명을 잃는 일도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죠. 문제는 이것이 단지 의료계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당장 겪을 수 있는 ‘공공 안전의 위기’라는 점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심각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필수의료 붕괴 현상에 대해 짚어보려 합니다. 원인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앞으로 어떤 대응이 필요한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출산할 곳이 없어진다고요?
현재 대한민국의 산부인과 병원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분만이 가능한 병원은 절반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3년 1000곳 이상이던 분만 의료기관은 2024년 기준 400여 곳에 불과합니다. 이 중 상당수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지방에서는 출산이 사실상 ‘원정 진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병원이 줄어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임산부들은 분만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에 시달리며, 조산이나 응급 상황 발생 시 제때 진료를 받기 어려운 구조에 놓이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사회, 출산율 하락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응급실이 있어도 진료를 못 받는 이유는?
응급의료는 빠른 처치가 생명을 좌우하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응급실을 찾은 환자가 몇 시간 동안 대기하거나, 이송 도중 병원을 찾지 못해 위급한 상황이 악화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특히 중증 외상이나 심장질환처럼 골든타임이 중요한 질환의 경우, 진료 가능 병원을 찾기까지 3~5곳 이상을 전전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단지 환자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해당 전문과목의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소아과, 흉부외과, 외상외과 같은 ‘기피 진료과’는 전공의 지원율이 10% 이하인 경우도 많아, 아무리 병원 시설이 갖춰져 있어도 진료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왜 의사들은 필수의료를 기피할까?
전공의와 젊은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업무 강도와 낮은 보상입니다. 응급의학과나 외상외과처럼 당직이 잦고 과로가 반복되는 진료과는 워라밸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면 성형외과, 피부과처럼 진료 강도가 낮고 수익이 높은 과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게다가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 부담도 큽니다. 생명을 다루는 진료일수록 법적 분쟁 위험이 크고, 한 번의 실수가 인생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은 젊은 의사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조건이 필수의료 분야로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방일수록 더 위험하다고요?
수도권의 대형병원에 비해 지방은 의료 접근성이 현저히 낮습니다. 의료기관 수뿐 아니라, 중환자실, 응급실, 분만실 등 생명과 직결된 기능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떤 지역은 심야시간에 응급의료 공백이 6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하며, 이로 인해 전국적인 의료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충북 지역의 한 병원에서는 야간 응급수술을 할 의사가 없어 환자가 헬기로 타 지역으로 이송되다가 사망한 사례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의료 붕괴는 단지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기본적 안전망 붕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필수의료는 돈이 안 되니까 포기한다고요?
필수의료 분야는 생명을 다루는 영역이지만 수익성이 낮습니다. 환자 1명당 진료비는 높지만, 그에 상응하는 의료수가(건강보험 보장 금액)는 낮아 병원 입장에서는 손해가 많습니다. 특히 지방 중소병원은 인건비와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 해당 진료과를 폐지하거나, 전문의 자체를 채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필수의료를 유지하라고 강제하기엔 예산과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며, 민간 의료기관 중심의 한국 의료체계에서는 수익성 없는 진료는 점점 도태되는 구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의료 인력 부족이 전반적 문제라고요?
의료계 전반에서 인력 부족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단지 의사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특정 진료과에 의사가 몰려 있고 다른 분야는 인력난이 지속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입니다. 간호사, 전공의, 응급구조사 등 현장의 필수 인력 부족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시스템 전체가 불균형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계 내부에서도 세대 간 갈등, 보수 불균형, 지역 편중 등의 문제가 얽혀 있어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현재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의료계뿐 아니라 국민의 이해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필수의료가 왜 중요한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목소리를 내야만 사회 전체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정부도 의료계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방 소멸과 출산율 하락, 노인 인구 증가 등은 결국 의료 안전망 강화 없이는 대응이 불가능합니다. 필수의료는 단지 병원 문제가 아니라 ‘내 가족과 나의 생명’과 연결된 문제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문제점과 해결책
지금의 필수의료 붕괴는 단순히 특정 집단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적으로 의료 시스템이 불균형하게 발전해 왔고, 보상 체계와 정책이 수요와 공급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함께 고쳐나갈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점은, 최근 정부와 의료계 모두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논의 테이블에 앉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필수의료 인력에 대한 지원 강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의료수가 인상 등 다양한 개선 방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반드시 살리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생명을 지키는 공공 건강의 힘
필수의료는 모두의 생명을 지키는 사회의 최소한입니다. 응급실도, 산부인과도 사라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나라에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위기를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알고,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순간 변화는 시작됩니다.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공공 시스템 위에 세워집니다. 공공 건강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는 지금, 우리 모두의 관심이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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